요즈음 우리나라에도 어휘발달 그림책이라는 것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특히 모국어를 체계적으로 늘려준다는 교육적 목적으로 연령별 아이가 익혀야 할 어휘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책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 고유의 생활과 물건을 소재로 모국어를 늘려주는 그림책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림책을 읽어주는 전체적인 행위가 아이의 언어발달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지, 어휘발달에 좋은 그림책을 골라 읽어야 언어발달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림책이라면 어떤 종류이건 그림이 좋아야 하고, 스토리가 재미있어야 하고, 아이의 흥미를 끄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부모가 읽어줄 때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지 않는 그림책은 아무리 언어발달에 좋고 교육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4세 아이들은 한글 맛을 알게 되어 읽어주면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한다. 그림책의 앞장과 뒷장의 그림을 연결하며 보고 듣는다. 언어지능이 높은 편인 아이들은 4세가 되면 문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스스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글자를 손으로 짚으며 발음하는 법을 불어보기도 한다. 이 때 한글을 자음과 모음으로 배울 수 있는 그림책을 보여주면, 한글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아이에게 ㄱ, ㄴ, ㄷ 를 가르치는 것은 한글을 더 어렵게 한다. 보통의 한글을 파닉스로 배울 수 있는 나이는 만 5~6세이다. 그 전에는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고 보여주는 것으로 한글공부가 족하다.
한글 공부에서 가장 배려해야 할 것은 아이의 취향이다. 순서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다른 사람의 감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어휘가 풍부하고 이야기 구성이 탄탄한 그림책을 좋아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재미있는 단어, 새로운 단어를 익힐 수 있는 골라주면 된다. 시는 사물을 함축적, 감성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동요 동시 그림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작은 사물을 깊이 있게 보고, 그 본질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좋은 시에 음악을 붙인 그림책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이 시기는 이 모든 것이 ‘언어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한글을 공부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되면, 책상에 앉힐 생각을 하지 말고, 아이 눈에 보이는 흔한 글자들을 먼저 인지하도록 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멈춤 표시판’, 과자봉지, 아이의 이름, 가족이나 유치원 친구들의 이름 등을 먼저 알게 하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하철에서 표시된 ‘출구’나 매일 마시는 팩의 ‘우유’와 같이 아주 친숙한 단어나 자기 이름의 첫 글자 모양을 인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우선 문장 안에서 무엇이 단어인지 인지한 다음, 단어 안에 있는 음절(예, 하-늘)을 인지하고 마지막으로 단어 안에서 음소가 나눠질 수 있다는 사실(예, ㅎ ㅏ ㄴ ㅡ ㄹ)을 서서히 인지해 나간다. 아이들이 자주 부르는 동요 안에서도 이런 인지는 이루어진다. 동요 안에는 두운, 각운, 반복 등으로 음소나 음절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두는 것이 많다. 따라서 ‘한글’을 가르치고 싶다면, 이 나이에는 학습지를 시킬 것이 아니라 친근한 단어를 많이 보고 듣게 하고 부르게 하는 것이 좋다.
사실, 한글은 되도록 천천히 익힐 때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글을 안 아이들은 자꾸 그림보다는 글을 읽으려 하기 때문에 그림책의 그림이 주는 혜택을 받기가 어렵다. 글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림을 더 유심히 보고 엄마 아빠 목소리에 더욱 집중한다. 나는 한글은 그림책을 보다가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을 많이 읽다가 한글을 읽힌 아이들은 자신의 인지발달과 언어발달의 속도에 따라 한글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림책을 통해 이미 아름다운 문장들에 익숙해진 상태라 글쓰기가 창의적이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 관찰력이며 상상력도 뛰어난 편이며 그림에 대한 심미안을 갖게 되는 것도 물론이다.
짧은 동시나 노래를 부르듯 한글 자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림책으로는 「기차 ㄱㄴㄷ (박은영/ 비룡소)」가 있다. ‘기다란 기차가 나무 옆을 지나 다리를 건너 랄랄랄 노래를 부르며’ 식의 글이 펼쳐지며 ㄱ, ㄴ, ㄷ 이 순서대로 등장한다. 한 장씩 넘기면 글의 한 문장씩이 연결되는데, 리듬감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이 묘사한 그림도 탁월하다. 이런 그림책을 읽어줄 때는, 반드시 ㄱ, ㄴ, ㄷ를 가르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호기심 정도를 유발한다는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ㄱ’을 가르치며, “이게 ㄱ이야. 기차에서는 이렇게 쓰였네.”라는 말은 하지 말자 1. 다른 그림책 읽듯 아이와 같이 보며 그림을 보며 재미있게 리듬을 타며 읽고, 아이가 물을 때 대답해주는 식으로만 한다. 부모가 목적을 가지면, 아이가 부담을 느끼고, 아이가 부담을 느끼면 제대로 알기도 전에 반감부터 생길 수 있다.
「까맣고 하얀 게 무엇일까요? (베뜨르 호라체크/ 시공주니어)」는 대조가 되는 짧은 문장들이 등장한다. ‘밤은 까맣고, 눈은 하얗다. 고양이는 까맣고, 우유는 하얗다. 까마귀는 까맣고, 거위는 하얗다. 까맣고 하얀 건 얼룩말이다.’ 부모가 읽어줄 때는 두 돌전부터 활용해도 좋다. 이렇게 글 밥이 적은 그림책은 아이가 한글을 한 두 글자씩 알아보고 스스로 읽어싶어할 때 유용하다. 아이가 글을 몰라도 쉽게 외워서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읽는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는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꼬리야 넌 뭘 했니? (여을환 글․ 윤지 그림/ 길벗어린이)」 는 작가가 여우 꼬리가 꼬부라지게 된 이유를 엉뚱하게 상상해본 이야기다. 개를 주려고 산 살코기를 물고 달아난 여우는, 기분이 좋아 자신의 코, 귀, 주둥이, 눈, 발 등에게 각각 무슨 일을 했는지 묻는다. 아이와 같이 이 그림책처럼 잘 아는 동물이나 사물이 그렇게 생긴 이유에 대해서 엉뚱한 상상을 해보면서 말놀이를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이다.「꼬마 미술관 (그레구와르 솔로타레프, 알랭르쏘 구성/ 물구나무)」는 멋진 명화를 보면서 한글을 배우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서 글을 좀 아이라면 간단하게 단어를 읽어보는 놀이를 할 수 있는 그림책이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아이라면, 부모와 아이가 서로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발달위원회